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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남매 엄마ㆍ아빠 로 불리는 것이 더 행복" 오종철(43세)ㆍ홍선미(34)부부

기사입력 2018.11.16 14:26 | 조회수 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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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군을 지키는 영광군민들의 삶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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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 저 오늘은 등심좀 주세요."

    "정말 고기 좋아하시나봐요.

    요즘 아가씨들 고기 안좋아 하던데, 오늘은 제가 특별히 더 맛있는 고기로 드릴께 요."

    "아저씨 ~오늘은 국거리로좀 주세요" "이렇게 자주 오시니 고기가 좋아 오시는건지 제가 좋아 오시는건지 이제 좀 헷갈리는 걸요" "뭐에요? 그럼 낼 부터 딴집 갈래요. 이 집 고기가 좋아서 오는거지 아저씨는 착각 하지마요!"

    "네. 그럼요. 알죠. 매일 이리 오시니 감사해서 그렇죠.

    제가 정말 너무 감사해서 그러는데 오늘 저녁 사드릴께 요. 시간 어떠셔요~?"

    "음~시간은 괜찮은데..."

    "그럼 오늘 저녁에 저 옆에 식당에서 만나요."

    가진거 하나 없는데다 선천성 장애를 지닌 다리로 무작정 축산쪽 전문가가 되고싶어 상경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서울살이에 선미 씨와의 만남은 하늘이 내리신 축복이 아닐수 없었다.

    그 날 이후 나의 고기자르는 칼솜씨는 춤을 추듯 발전해 갔다.

    그렇게 이 못난 영광촌놈에 게도 세상이 아름답다는 말이 뭔 뜻인지를 느끼며 살고 있는 어느 날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종철아~ 아부지가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이제 혼자서는 염전일을 못하겠쓰야. 니 헝아도 못한다고만 하니 니가 와서 이 아부지 도와주면 쓰것는디 .."

    홀로 염산에서 염전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전화에 난그길로 다시 짐을 싸 고향으로 내려갔다.

    나의 빛이 어둠이 되는 순간 처럼 느껴져 가슴 아팠지만 아버지의 부탁을 져버릴수가 없었다.

    염전으로 내려오고 며칠 후이번엔 그 깍쟁이 서울아가 씨한테 전화가 왔다.

    "아저씨 언제와요."

    "선미씨 죄송해요. 저 못가요. 아버지가 혼자 계시는데 몸이 너무 불편해서 제가 곁에 같이 있어드려야 해요.

    선미씨..정말 미안해요. 좋은 사람 만나요."

    영광촌놈..그래. 내 꼴에 무슨 복에 서울아가씨를 만나

    "아저씨네 집 영광이라고 했죠?"

    "네. 전라남도 영광이요" "알겠어요. 내일 전화하면저 터미널로 데리로 오세요."

    "네?! 선미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신다구요? 여기 를요?"

    "아저씨 저 좋아한다면서요.

    저 좋아하는 고기 평생 원없이 먹게 해줄거라면서요."

    "네. 그거야 그렇지만. .선미씨 여기 영광은 아직 시골이 에요. 염전일은 더더구나 힘들고 아버지까지 모셔야 하구 선미씨 너무 힘들꺼에요" "아저씨가 도와줄꺼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정말 오실꺼에요?"

    "내일 봐요" 뚜뚜뚜 그렇게 영광이 어딘지 염전이 어찌생겼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서울아가씨가 영광 댁이 되는 순간이었다.

    9살의 나이 차이에도 선미씬 늘 나보다 지혜로운 생각을 해냈고 스물살의 어린 나이지만 스러져가는 나를 일으켜 세울만큼 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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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을 만든다는것이 자연의 뜻에 인간이 따르며 해야 하는 일이라 나의 욕심만으로 할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빚만 늘어 갔다.

    힘들게 일궈둔 소금이 내리치는 비에 다 다시 물이 되어 버리 날 내 눈물도 같이 흘러버리며 두번다시 염전 일은 안하겠노라 댜짐을 하고 무작정 선미씨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선미씨 뱃속에 내 아이까지 우리 세 식구는 갈곳이 없어 군남의 허름한 빈집을 빌려 들어가 살기 시작했고 임신막달인 아내를 그 한겨울에 냉방에서 지내게 하며 새벽녁 인력센 터를 찾기 시작했다. 허나 불편한 내 다리를 보고 아무리 내가 열심히 하겠다 애를 써도 나를 쉽게 데려가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허드렛일을 하고 받은 일당 9만원으로 집에 기름을 채우고 일주일 만에 따뜻한 방온기를 느끼며 행복해하는 아내를 보며 못난 나 자신을 얼마나 원망을 했는지..첨으로 나를 이리 낳아준 내 부모를 원망 했다.

    정신차리자. 정신차리자. 를수없이 반복하고 난 이를 악물고 버텨야했다. 배운거 없고 가진것 없는 내가 내 가족을 지키는 거라곤 이 악물고 버티는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가 살아갈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주변에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 대견스럽고 안쓰럽다며 많은 도움을 주셔 뭔가는 계속해서 했는데 야속하게도 하는것 마다 번번히 실패를 했다. 허나 실패할때마다 아이는 한명씩 늘어 난 지금 6 남매 아빠이다. 내 인생이다 실패한것만이 아닌 증거가 바로 선미씨와 나의 6남 매이다.ㅋㅋ 가진것도 없으 면서 아이를 왜 이렇게 많이 낳았냐고들 하시는데 그 심장소리를 듣고 어찌 나쁜 생각을 가질수가 있을까..

    4년전부터 나는 아내와 노 점상을 한다. 중고로 트럭을 한대 사 푸드트럭으로 개조해 매일 아내와 다닌다. 민원으로 쫓겨나기도 여러번.

    이런 우리부부를 안쓰럽게 여긴 분의 소개로 지금의 노점자리 땅주인을 만났고 너무도 감사하게 한번에 사장 님의 땅위에서 이제 편히 장사하라고 응해주셨다. 노점 이다보니 허가를 낸건 아니 지만 땅주인이 허락을 해주신 것만으로도 우린 빌딩을 세운 기분이었다.

    그 분의 배려 덕분에 작고 허름하지만 아담한 우리의 일터를 마련했다.

    아이들도 건강하게 예쁘게잘 자라고 있고 큰아들녀석은 체조선수로 대회에 나가 상도 타왔다. 정말 나의 보물들이다.

    없는 집에서 태어나 살아가 는것이 쉽지 않다는건 내 인생이 그러해 누구보다 잘알 기에 내가 부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할때가 많다. 하필 내가 아빠라서..

    허나 언제 어디서든 나를 보면 부끄러워 하지않고 아빠라 달려와 안기는 내 아이 들이 있고 다시태어나도 나와 다시 결혼하겠다는 선미씨가 있고 출퇴근 할수 있는내 노점가게가 있고.

    이만하면 가진것 하나 없던 영광촌놈 출세 한거 아닌가요? 허가 없는 노점이지만 신선한 재료만 쓰겠습니다 .깨끗하게 조리하겠습니다.

    저희 집의 가장 큰 단골손님은 저희의 보물 6남매 입니다.

    저희아이들이 먹는 음식을 조리해 여러분께 판매할 것을 약속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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